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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에 대한 기억, 그리고

6월 민주항쟁과 민주투사 노무현(마지막)


** 기록이 없는 역사는 교훈이 되기 힘들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우리는 87년 6월 당시 노무현의 모습을 객관적인 기록으로 되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6월 민주항쟁 이전부터 노무현 변호사는 정권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1987년 2월 7일 열렸던 박종철 열사 추모제에서 연행당한 노무현 변호사에 대해 검찰은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현직 변호사에 대해 구속영장까지 신청한 것 자체도 이례적이었지만, 재판부가 영장을 기각했음에도 4차례나 재신청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이 위협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6월 민주항쟁의 중심조직이 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노무현 변호사가 맡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된 다음날인 1987년 5월 21일 부산대에서는 ‘범시민 시국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각계각층의 대표와 부산의 대학생들이 공개적으로 벌인 토론회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발언자로는 해고노동자, 시민대표, 재야대표, 철거민, 대학 총학생회장 들이 나왔는데, 노무현 변호사는 재야대표로 이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날 노무현 변호사는 특유의 솔직함으로 청중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자기는 특권층의 한 사람임을 밝히면서 “그러나 현 정권의 정통성은 어느 계층에서건 인정하지 않는다‘며 호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민주헌법 쟁취를 위해 싸워나가자고 주장한다.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된 6월 10일이 다가오면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6월 1일에 “누가 이 나라의 주인인가?”라는 유인물을 5만부 배포했고, 6월 6일에는 6월 10일 열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부산시민대회’를 알리는 유인물 10만부를 배포했다.

드디어 1987년 6월 10일이 되었다. 그 전날엔 서울 연세대 앞에서 시위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중태에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국민적 분노를 더욱 키웠다. 6월 10일 부산에서는 대각사 앞에서 열릴 대회가 봉쇄되었고 경찰은 시민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했다. 그러나 부산 자갈치 시장일대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가 밤 11시 30분까지 벌어졌다. 시위는 6월 11일, 12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6월 13일에는 대학생 1,000여명이 부산역앞 8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1시간동안 연좌농성을 했고, 그날 저녁 7시에는 부산대생 7천여명이 부산대에서 집회를 하고 그 중 2,000여명이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고 가두로 진출했다.  

6월 16일부터는 부산가톨릭 센터에서 일주일간 학생, 시민 350여명이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쏜 최루탄 불발탄이 매일 한 상자가 쌓이고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지만 농성은 이어졌다. 계엄령이 내려진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흉흉한 상황이었지만, 농성은 이어졌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처럼 6월 민주항쟁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6월 16일에는 부산 범천동 고가도로에서 시위도중에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 직격탄에 맞은 사람(이태춘 열사)이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6월 22일에는 귀가중이던 시민, 학생들이 탄 버스에 경찰이 최루탄 50발을 터트리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런 속에서도 시위를 이끌어갔던 지도부는 국민운동 부산본부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노무현이었다.

6월 18일에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열렸다. 이날 부산에서는 30여만명의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8차선 도로를 꽉 메울 정도로 모였다. 

6월 26일에도 6월 28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6월 28일 천주교 부산교구 주최로 “폭력종식과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끝난 후 5,000명의 군중들이 평화행진을 했고, 부산카톨릭 센터 앞 도로에서 연좌했다. 이 때 노무현 변호사 사회로 1시간 30분 동안 “부산시민 시국토론회”를 열었다. 이날의 시국토론회는 시종 박수와 환호, 폭소가 터지는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사회자였던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이 컸던 것같다.

이날 노무현 변호사는 “평소 할 말도 못하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길 하지 않으면 억장이 무너져내릴 것같은 사람은 나와서 맘껏 얘기하라”고 하여 노동자, 학생, 상인, 교인 등이 나와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고 한다. 그 중 어느 한 사람은 “동창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뽑자”고 열변을 토하여 잠시 연설이 중단될 정도로 열띤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6.29.선언’을 발표한다. 8개항의 수습안으로 이루어진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헌법개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6월 민주항쟁은 7월, 8월의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무현은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에서도 노동자의 편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88년 4월 국회의원으로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87년 6월을 전후한 노무현의 행적에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노무현의 '순수한 원형'을 그 때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폭압적인 군사정권 하에서 자신의 몸을 던졌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무언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